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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궁녀들의 모든것 선발 성생활 급여 재산과 외출 출궁

by 단석비후 2024. 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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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공로비의 딸로 태어난 아이. 상궁인 친척 이모를 따라가면 좋은 옷을 입고 배불리 먹을 수 있다며 엄마는 애써 딸을 떼어놓으며 정을 끊습니다. 없는 살림에 엄마가 챙겨준 요강 수저 그리고 무명 이불이든 보따리를 들고 상궁 이모를 따라간 곳은 궁궐.


궁녀가 되기 위해 입궁을 하면 가장 먼저 치르는 것이 앵무새 처녀 감별법 입니다. 앵무새 피를 여자아이의 팔목에 묻혀 흘러내리지 않고 잘 묻으면 처녀라고 생각해 궁녀가 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잘 묻지 않고 흘러내리면 처녀가 아니라고 생각해 다시 본가로 돌려 보내졌다고 합니다.


조선의 궁녀는 국노비에서 뽑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간혹 일반 백성이나 사노비의 딸들도 입궁했다고 합니다. 입궁시기는 대체로 10살 전후.


고종실록에 의하면 대전 중궁전 데뷔전에는 각각 세자궁은 60명, 세자빈궁은 40명, 세손궁 50명, 세손 빈궁 30명으로 궁녀의 수를 정해 놓았습니다. 대략 500여 명 정도의 궁녀가 거래소 생활했으며 이 수는 왕의 가족이 많고 적음에 따라 차이가 있었습니다


또 궁녀는 자신이 처음 발을 들여놓은 처소의 주 상전으로 모시게 된다고 합니다. 대전의 궁녀는 죽을 때까지 왕을 위해 살아야 했으며 중궁전의 궁녀가 되면 왕비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했습니다. 제 아무리 임금이라도 다른 처소의 궁녀에 대해서는 관여할 수 없었습니다


조선 궁녀의 선발은 10년마다 한 번씩 이루어졌다고는 하나 실제로 각 처소에서 필요한 인원을 그때그때 충원해 교육시켰다고 합니다. 대부분 친척 궁녀의 소개로 들어오기 때문에 소개한 친척들이 하는 일을 그대로 물려받았습니다. 어린 궁녀 즉 생각지들은 선배 궁녀들이 하는 일을 옆에서 보고 어깨너머로 배우고  교육이나 현장 실습을 하며 업무를 익혔습니다

또 생각시 시절에는 업무 교육뿐만 아니라 한글은 물론 소학 삼강행실도 등 기본적인 학문도 익혀야 했으며 규율이 엄격했습니다. 특히 왕과 왕비를 모시는 궁녀들은 생리적인 현상인 방귀도 마음대로 낄 수 없었고 교육을 받다가 방귀를 껴 실수라도 하면 부모에게 연락해 음식을 해와 상전들을 대접하는 벌을 받아야 했다고 합니다.

섣달 그믐이 되면 처음으로 입궁한 생각시들에게 무시무시한 신고식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불을 든 환관들이 어린 생각시들의 입을 지지는 시늉을 했던 것이죠. 새로 입궁한 어린 궁녀들에게 말조심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동시에 궁녀들 사이에 숨어 있을지도 모르는 잡귀들을 몰아내고자 하는 조술적 행사였다고 합니다

조선의 어린 생각신 입궁한지 10여 년이 지나면 계례식을 통해 비로소 정식 궁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을 가르쳐준 상궁이 어머니가 되어 계례식을 치르고 드디어 비녀을 꽂게 됩니다. 생각시가 의식을 끝내면 정식 궁녀라는 뜻으로 나인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조선의 궁녀는 나인이 되면 방이 주어지는데 두 세 명이 함께 사용했습니다. 이때 한 방을 같이 쓰는 나인들은 상궁이 될 때까지 20년 이상을 방 동무로 지내야 했습니다. 나인이 되면 방 청소와 심부름을 하는 하녀도 한 명 배정되어 일상적인 일보다 주어진 업무에 전념할 수 있게 했습니다

조선 궁녀들의 근무 조건은 보통 8시간 일하고 다음날 하루를 쉬는 격일 근무제로 근무 환경이 비교적 좋은 편이었죠. 하지만 침실을 지키는 지밀 라인들은 근무시간이 길어 통상 12시간 근무하며 3교대 근무 숙직을 한 궁녀들은 날이 밝으면 주간
근무자와 업무 교대를 하고 퇴근을 해 24시간 휴식을 취한 뒤 주간 근무를 하게 됩니다

밤 근무를 하는 지밀나인은 상전의 침실을 지켜야 하는데 대전의 경우 평균적으로 8명의 지밀 궁녀가 왕이 자고 있는 방 주변에서 뜬눈으로 침실을 지켰고 지밀 궁녀의 근무 형태 인원 근무자 등은 국가 최고 기밀사항이라 관료조차 알 수 없었으며
관심을 가져서도 안 되었다고 합니다.


궁궐에는 궁녀들을 위한 목욕 공간이나 화장실 등 편의 공간이 없어서 목욕을 할 때면 방에 세숫대야나 나무 목욕통을 들여놓고 물을 받아와서 씻었고 용변도 요강을 이용했다고 합니다

3교대 근무로 비교적 여가 시간이 많은 궁녀들은 놀이나 바느질 글씨 연습을 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조선 중기 이후에는 궁녀들이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광해군때 수입되었던 담배를 즐겨 하지만 담배를 피우고 싶다고 해서 너도 나도 필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일정한 자격 시험을 통과해야 필 수 있었습니다.


담배를 필 수 있는 자격시험은 선배상궁 앞에서 담배를 피며 선배 상궁이 그만할 때까지 지치도록 피워야 하는 것이죠. 목이 아프거나 담배 연기에 질려 중간에 포기하면 낙방하면 다시는 담배를 필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이 시험의 통과한 궁녀들에겐 선배 궁녀와 장족을 문 맞담배 질도 허용되었다고 합니다

조선 궁녀들은 궐에서 먹고 입고 자는 것 이외에 월급을 받아 처음 나인이 되면 쌀네 말, 콩 한 말, 다섯 들, 북어 13마리를 받았다고 합니다. 월급은 노동강도에 따라 달랐는데  힘든 일을 많이 하는 무수리들은 쌀을 여섯 말 받아 신참 나인들보다 두 말을 더 받았습니다. 또 품계가 높을수록 월급은 많아져 정상품 상공이 16말 5대 콩 5대 북어 80마리를 받았다

게다가 연말이나 명절에 받는 특별상여금이 있어 높은 수입을 올린 고액 연봉자였다고 합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배를 골아야 하는 공노비나 백성들이 궁녀로 보내려고 한 것이죠. 

 

조선 궁녀들의 궐박 외출은 비교적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지만 월급을 타면 친정 나들이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기도 했습니다. 외출을 하려면 먼저 윗전 상공에게 허락을 받고 또 담당 환관에게 재차 승인을 받아 출이라고 써진 패를 받아야만 궐 밖을 나갈 수 있었습니다. 물론 나들이를 끝내고 돌아오면 이 패를 반납해야 했고요. 그리고 출입장부에 언제 나가고 언제 돌아왔는지 자세히 기록하여 궁녀들의 대궐밖 출입을 엄격하게 통제했다고 합니다.

조선 궁녀의 대식 사건으로 대표적인 것은 세종의 아들 문종의 두 번째 세자빈 봉씨 사건입니다
세자빈 봉씨은 자신이 부리던 궁녀 소쌍과 동침을 했다 이 사실이 발각되어 결국 소쌍은 참형을 당하고 세자빈 봉씨는 폐위되었죠. 이때 세자빈 봉씨는 궁녀 소쌍과 다른 궁녀가 서로 대식하는 장면을 목격해 흉내를 내본 것이라 하였습니다.


조선 궁녀들 역시 그 죗값을 참혹하게 다스려도 목숨을 담보로 한 연애 사건이 종종 있었다고 합니다. 궁녀들의 연애 상대는 주로 별감과 환관들이었죠. 연애를 하다 궁녀가 임신이라도 하게 되면 아이를 낳고 100일 동안 젖을 물릴 수 있는 일반 여성 죄인과는 달리 출산과 동시 사형에 처했다고 합니다

이런 연애 사건은 궁녀들의 언행을 감시하는 감찰상궁이 궁녀 개개인의 뒷조사를 해 찾아내곤 했습니다. 한번 궁에 발을 들여놓으면  죽어서도 궁궐 귀신이 되어야 한다는 궁녀들에게도 예외는 있었습니다

조선에서는 나라의 가뭄이 들면 궁녀들을 출궁시켰다고 합니다. 결혼하지 못한 여인들의 한이 하늘에 닿아 날이 가문다고믿었던 조선 사람들은 이들의 원한을 풀어주기 궁녀를 출궁시킨 것이죠. 꿈에도 생각지 못한 조선 궁녀의 출궁은 숙종 때와 영조 때 두 번 있었다고 합니다

승은을 입지 못하면 승진이라도 해야 하는 조선 궁녀들. 입궁에 생각시로 10년을 일하면 나인이 되고 나인이 된 후 지밀의 경우는 25년 그 외에는 35년이 지나야 상궁이 됐습니다. 하지만 근무 기간에 따른 승진은 숫자에 불과하며 남들보다 빠른 승진 기회를 잡기 위해 궁녀들도 권력 있는 환관이나 대신들과 결탁했습니다

국내 조직에서 최고 권력자는 제조상궁. 제조상궁은 정 일품의 벼슬을 왕으로부터 직접 하사 받았다고 합니다. 당상관 이상의 양반 관료보다 더 많은 월급을 받았고 심부름을 하는 하녀와 옷을 짓는 친모까지 배정되어 권력과 부를 손에 쥘 수 있게 된다

제조상궁은 그 자리가 비면 경합으로 선출되는데 선출 방식이나 시험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제조상궁이 되기 위해서는 온갖 권력이 동원된다고 합니다.

조선의 궁녀들도 재산 증식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주로 논과 집등의 부동산을 매입하는 형식이었죠. 인조 효종 현종 3대에 걸쳐 상궁으로 일했던 박씨는 자신의 명의로 부동산을 사고 국가의 공증까지 받았다고 합니다. 그 재산이 만평 이상이었으며 노비까지 부리는 지주가 되었다고 합니다

정조 실록에는 궁녀들이 기생이나 액정서 별감 둘을 데리고 꽃놀이 뱃놀이를 즐겼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아무리 힘이 생기고 권력을 잡아도 조선 궁녀들의 운명은 자신이 모시는 왕이나 왕비의 운명에 따라 달라졌습니다. 모시는 상전이 죽으면 3년 상을 치르고 출궁해 결혼도 하지 못하고 오직 상전의 명복을 외롭게 살아가야 했죠. 

왕과 왕의 가족을 제외하고 그 어떤 누구도 궐에서 죽음을 맞을 수 없었던 조선. 철없던 어린 시절에 아무것도 모르고 궐로 들어와 한평생 왕과 왕비 왕의 가족을 위해 살던 조선의 궁녀들. 나이가 들어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되면 출궁을 해 비슷한 처지에 궁녀들과 의지하며 함께 살다 쓸쓸히 죽음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조선의 궁녀가 죽으면 함께 지내던 동료 궁녀 유언에 따라 화장을 해 산야에 뿌리거나 절에 모셔졌습니다 간혹 후손이 있는 궁녀들은 후손들이 묘를 써 관리하기도 했고요.  


보모상궁 김씨지묘. 서울특별시 은평구 한 야산에 남아있는 김상궁의 묘 역시 후손들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손길이 끊긴지 오래됐습니다.  500여년의 세월을 조선 왕조와 함께 동고동락했던 조선의 궁녀들. 그녀들은 의복, 음식 등 다양한 궁중 문화를 우리에게 남기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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